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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aster story

조선판 위기탈출 넘버원

조선판 위기탈출 넘버원!

 

 

안녕하세요! 희망블로거 김지현입니다. 

 

앞으로 3주간은 전공을 살려(저는 사학과 학생입니다^^)

역사와 재해를 주제로 포스팅을 할까 합니다.

 

 

오늘은 조선시대에 발생했던 '재난'과 그에 따른 조선정부의 '대응'을 살펴보겠습니다.

 

특별히 조선으로 시대를 한정지은 것은 바로 잘 보존된 기록유산들 때문입니다.

(지금과 가장 가까운 시대여서 그렇기도 하구요.)

조선은 세계에서도 인정할 만큼 자세하고도 방대한 기록문화를 자랑합니다.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위의 승정원일기조선왕조실록모두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입니다.

한국안전학회에서는 이 두 기록유산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재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였습니다.

 

사회 유지 위험요소로 작용한 재난을 5가지로 구분, 규정하고(지진, 한재, 풍수해, 화재, 이상기후)

그에 대한 대응방법을 조사했죠.

 

 

논문, 조선시대의 재난 데이터베이스 구축 및 대응에 관한 연구(이지희, 방용 저)

 

 

 

 

1. 지진

 

 

지진은 여러 재해들 중에서도 지역성이 심했습니다.(지역성이 크다는 것은 별 발생 빈도의 차이가 크다는 뜻입니다.)

전라도, 충청도, 평안도 순으로 빈번히 발생하였습니다.

 

 

 

 

2. 한재

 

 

한재는 가뭄에 의해 발생하는 피해를 일컫는 말입니다.

 

 

 

 

한재는 조선시대에 가장 심각하게 여겼던 재해로 볼 수 있습니다. 지역에 편중되지 않고 고르게 발생하는 양상을 보였는데, 이를 다스리기 위해 토속신앙에 기인, 기우제를 지냈습니다.

 

 

 

 

 

 

임금은 나라에 닥친 이와 같은 재난을 자신의 부덕으로 인한 것으로 여기고,

수라상에 올라오는 반찬 가짓수를 줄이거나 거처하는 궁을 옮기기도 하고, 신하들에게 충고를 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를 구언이라고 합니다.)

혹은 백성들에게 금주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3. 풍수해

 

 

풍수해는 센바람과 호우 또는 센바람, 호우, 폭풍해일, 파랑 등이 겹쳐서 발생하는 복합적인 재난입니다.

 

146건으로 경상도에 가장 많이 발생하였고 서울은 16건으로 발생 횟수가 가장 적었습니다.

 

 

 

4. 화재

 

 

장소에 따라 민가화재, 산불, 릉 화재, 궁궐 화재, 관청 화재 등이 있었으며

발생 횟수에 관하여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의 기록 간 차이가 있습니다.

 

화재에 대한 대응은 유형 대응과 무형 대응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유형 대응은 실질적 예방으로, 방화벽을 세우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신윤복, <주사거배>

 

 

실제로 당시 화재가 발생한 가장 큰 원인은 술에 취해 화기 취급에 부주의한 것이었는데요,

이 때문에 '금주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무형 대응으로는 역시나 토속신앙에 기인하여 제를 올리는 방법을 취했습니다.

 

 

 

5. 이상기후

 

지구의 온난화 등으로 인한 비정상적인 홍수, 가뭄, 폭서, 한파와 같은 특이한 기후현상을 말합니다.

 

이상기후 현상은 지역성이 심하지 않은 편이었고,

평안도 50건으로 가장 많이 발생하였으며 황해도는 21건으로 가장 적었습니다.

 

 

  

정리해보자면,

지역성이 큰 재난은 지진>풍수해>한재>이상기후 순이었고,

서울지역은 조선의 수도로서 현재와 마찬가지로 수도권 인구 집중현상처럼 민가화재가 많이 발생하였으며, 특히 한재도 심했습니다.

경상도 지역의 재난 발생이 가장 빈번했으며 이어서 평안도>전라도 순으로 발생률이 컸습니다.

발생 횟수가 가장 적은 지역은 함경도>황해도 순이었고요.

 

조선은 기본적으로 재난을 임금의 부덕(땅의 일)으로 인해 백성, 궁녀들이 한을 품어 하늘의 화기를 거슬러 발생한 천재지변으로 보았습니다.

그중에서도 한재를 가장 큰 재난으로 보았죠.

 

김홍도, <타작> 

 

 

이는 조선이 농업을 바탕으로 한 사회였던 것과 큰 밀접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상한 것처럼 토속 신앙에만 매달려 실질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종실록>

 

 

성종14, 19, 20년의 기록을 보면, 점차 재난에 대응하는 방법이 달라지고 있는 찾을 수 있습니다.

실록에 따르면 정부는 빈번히 발생하는 화재를 더 이상 천재지변으로만 여기지 않고

백성들이 불을 경계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화재가 일어날 때마다 임시방편으로써 금화령을 내리는 데 그치기보다는 상례’, 즉 늘 당연히 주의해야 할 것으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점차 재난의 원인을 현실에서 찾고, 구체적인 대응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